어느새 인터넷 서점에 익숙해진 탓에 정말 오랜만의 서점 나들이였다. 쭈뼛거리며 서점문을 열었을 때 아련히 풍겨나는 종이냄새가 아니었더라면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를 일. 아마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람들도 향기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닐까

가방에 책 몇권 넣고 다니며 책을 빌려주는 일로 시작해 서점간판을 내건 지 올해로 10년됐다는 ‘책이 있는 글터’ 이연호 사장.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 베스트셀러가 좌지우지되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더니 “그나마 책을 접할 통로를 만들어주었으니 고맙고, 착한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은 따뜻한 것을 원하는 독자와 출판사의 상업적 판단이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라며 기왕이면 현실반영보다는 앞을 내다보고 이끌어가는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단다. 그렇다면 진보주간지를 표방하는 <한겨레21>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베트남 문제를 다뤄주는 거나 사회의 건강성을 찾아주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점이 맘에 든다며, 언론에서 문화의 획일성만 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지역곳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지역문화를 발굴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말끝에 <한겨레21>이 이 서점에서 제일 잘나가는 주간지라고 슬쩍 웃어넘기더니, 도서정가제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목소리가 높아진다. “타격을 받는 건 사실이다. 독립서점들은 가격인하를 앞세우는 인터넷 서점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서점이 완결된 텍스트의 전달이 아니라 책의 향기를 전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떠난 것”이라며 서점주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라면 이연호 사장에겐 할말이 있을 것 같다.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도 홈페이지를 통해 다양한 도서정보를 제공해왔고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열일곱번에 걸쳐 소식지를 만들어 독자들과 만나왔다. ‘안 되는 장사목’이라는 출판사들의 우려에도 95% 고정고객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만 보더라도 ‘책이 있는 글터’는 나름대로 향기를 갖고 있는 게 아닐까

국문학도 시절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예를 무기로 살겠다던 청년시절의 꿈은 이제 서점 경영에서 서점 이름을 내건 문화제로, 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4만여권의 책을 전시 대여할 시민도서관을 여는 것으로 확대해갈 계획이다. 물론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른바 ‘선한 연대’를 통해 서점을 독자들이 지역문화를 만들어가는 통로로 만들어가겠다고 한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등 뒤에 있던 녹차 다구와 “차 끓일 물 주세요”라고 외쳐달라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물은 셀프입니다”라는 말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눅눅한 종이냄새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 그런 행복감이야말로 동네 서점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별 서비스가 아닐는지. (2002-12)

이윤영/ 5기 독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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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처: 동네서점 '문화 아지트'로 거듭나다



충주의 서점 ‘책이 있는 글터’ 한쪽에 마련된 차 마시는 공간. 맞은편엔 책 읽는 테이블이, 지하엔 음악감상실과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다. 충주=김희경 기자
《충북 충주시에서 농사를 짓는 박종호(37) 씨는 3년째 매주 한 차례씩 이웃 주민 10여 명과 함께 음악을 듣는 모임을 꾸려 가고 있다. 주로 재즈를 듣지만 14일에는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54) 등 일본 뉴에이지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었다. 박 씨의 음악감상회가 열리는 곳은 엉뚱하게도 서점이다.》

충주시 금릉동의 서점 ‘책이 있는 글터’(글터) 지하 매장에는 방음벽과 이중문, 진공관 오디오를 갖춘 음악감상실이 갖춰져 있다. 이곳에선 박 씨의 음악감상회뿐 아니라 종교음악 듣기 모임, 동화 읽는 교사 모임, 주부들의 독서토론 모임이 자발적으로 열린다.

“소도시에서 문화적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겐 오아시스 같은 곳이죠.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서점이 아무리 싸도 일부러 여기에 와서 책을 삽니다. 이런 공간이 사라지면 안 되거든요.”

동네 서점이 지역의 문화 아지트로 거듭나고 있다.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밀려 동네 서점은 10년 전 5000여 개에서 지난해엔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고사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그러나 일부 서점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복합문화공간으로, 책의 향기가 넘치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글터엔 음악감상실뿐 아니라 고객이 직접 차를 끓여 마시는 공간, 상설 전시공간도 마련돼 있다. 전시공간에선 동네 미술학원 아이들이 만든 로봇 30여 점을 전시하는 ‘헬로! 마이 로봇 전’이 열리고 있다.

다음 달엔 아이들이 고구마를 직접 심고, 그림책 ‘할머니 농사일기’를 그린 화가 이제호 씨와 함께 나무 세밀화를 그리는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 이 행사를 위해 글터의 이연호(43) 사장은 사비로 300평짜리 밭을 1년간 임차했다.

이 사장은 “독자와 책이 변했는데 서점만 변하지 않았다. 이젠 서점이 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책 무료 배달도 해준다. “자장면도 배달하는데 책인들 왜 못하랴. 배달도 서점이 독자와 대화하는 통로”라는 생각에서다.

글터와 뜻을 같이하는 전국 중소 서점 4곳은 지난해 여름 ‘문화를 만들어 가는 서점연대’를 만들었다. 서울 은평구의 불광문고, 강원 춘천시의 광장서적, 경남 진주시의 진주문고가 ‘서점연대’에 참여해 문화행사를 공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이철수 판화 전시회’를 공동으로 열었고 22일 춘천시 남이섬에서 개최되는 ‘세계 책나라 축제’에는 별도의 부스를 만들어 그림책과 생명 관련 책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또 ‘표지가 노란 봄 책’ ‘화장실에서 보기 좋은 책’ 등 주제별로 책을 진열해 독자에게 재미있게 다가가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이들 말고도 지역에서 문화 아지트로 자리 매김한 서점은 한둘이 아니다. 지금까지 18회에 걸쳐 인문학 분야의 저명한 저자 초청 토론회를 여는 등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전용 서점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부산 수영구 남천동의 ‘인디고 서원’, 어린이책 전문서점인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의 ‘동화나라’, 대학로 유일의 서점이자 문화사랑방인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이음아트’ 등이 있다.

‘서점연대’ 대표이자 불광문고를 운영하는 최낙범(46) 사장은 “서점은 물건을 쌓아 놓고 파는 슈퍼마켓과 달라야 한다. 동네 서점의 활로는 젖은 낙엽처럼 지역에 밀착한 문화의 중심이 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동네 서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이들도 자유롭진 못하다. 인터넷 서점의 할인경쟁으로 큰 타격을 받는 가운데 서적도매상, 출판사가 동네 서점과 거래를 중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글터의 이 사장은 “(우리는) 충주에서 가장 큰 서점인데도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해 온 출판사가 몇 군데 있다”며 “출판문화를 장기적으로 발전시켜 가려면 출판사들도 지역의 거점 서점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충주=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