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손이 아름답지만, 가난하여 나눌 것이 적은 손은 순정합니다. 가난보다 더 깊은 기도는 없음을 빈손이 알려줍니다. 일하는 손도 아름답지만 쉴 때 쉬면서 그 손을 조용히 살피는 성찰의 시간도 소중합니다. 일만 하다 죽으라는 인생 아닌 것을 빈손의 묵묵함을 통해 다시 깨닫습니다. 몸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살아가는 손에게 몸이 하는 대답도 있어야 합니다. 존재가 두루 무상해서 하루하루 나이 먹다 보면, 힘없이 앙상해진 손을 가슴에 품어 안고 살아온 날들 되돌아보게 될 테지요. 손이 기억하는 한 평생이-선한 것이건 악한 것이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난을 위해서 쉬지 말고, 맑고 투명한 존재와 마음을 위해 쉬는 손을, 나태해진 손이 아니라 성찰과 기도로 간절해진 손을 꿈꾸어야 합니다. 마음 곳간이 넉넉해지면 손은 가난 속에서 오히려 여유로워집니다. 그것을 일컬어 청빈이라 합니다. 청빈의 서늘한 손끝을 ! (125쪽)
빈손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놓는 연습이 참으로 힘들다.
무엇이든 잡히면 놓으라 했는데.......
집히는 건 모두가 놓아지질 않는다.
헌데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저 앞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그곳인데.....
이것과 저것이라는 분별심과
이것이네, 저것이네, 라는 차별심이
보이지 않아야 하거늘 이제는
도무지 잡히지도 놓아지지도 않는다.
그 어떤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데...........
오래 전 사할린 섬 남쪽 끝에 있는 코르사코프라는 곳에 갔을 때였다.
바닷가 작은 언덕, 나무 한 그루 없이 듬성듬성 나 있는 풀섶 위에 남루한 나무 벤치 하나가 놓여 있고, 동포 노인 한 분이 낮아 고국을 향해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듯 기묘했다. ‘저렇게 반세기를 앉아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슬그머니 다가가 그 분의 표정을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그저 멍해졌다. 상상과는 정반대로 그렇게 온화한 모습일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 분을 미소 짓게 했을까?
돌아온 나는 참담했고 한동안 자괴감에 빠졌다. 무엇인가 구하러 간 그곳에서 목격했던 상황들은 되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어떤 곳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곳곳에 스며 있는 이웃들의 비원을 외면한 채, 그 사회가 추구한다고 하는 안정과 번영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느 날 장산곶매가 코르사코프의 고적한 잿빛 하늘 아득히 먼 곳에서 찬 공기를 가르며 선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이 책을 한창 그리고 있던 중에도 이십여 년을 가깝게 지내던 팔순 노인 한 분이 북녘에 가족을 둔 채 세상을 하직 하였다.
혼자 살던 그 분은 평소 가족 이야기를 꺼렸고, 나는 조심스러워 잘 묻지도 못했다. 그러던 분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그리운 정도가 아니오...”였다.
지인과 함께 고향이 가까운 대동강에 유골을 뿌리면서 문득, 슬픔보다도 이 버젓한 세상에서 왜 가족이 서로 못 만나야 하는지 ‘참 이상하다’는 단순한 생각이 복받쳤다.
이 책을 마무리할 즈음 기회가 되어 오랜만에 코라사코프에 다시 가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는 장엄하게 다가왔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동산’에서 육십 년 만에 처음으로 지내는 망향제의 굿 소리를 뒤로 하고 아련히 빛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돌이의 다음 이야기를 꼭 그리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2006년 1월 유재수
*코르사코프 :
과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15만 동포들의 한이 서려 있는 사할린 섬 맨 남쪽 끝 고국을 향한 곳에 위치한 항구 도시.
해방직후 섬 각처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동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도시에 집결하였으나, 귀국선의 원인 모를 폭발로 수천 명이 수장 되는 등 집요한 외세의 방해와 고국의 무관심으로 귀향의 꿈이 좌절되고 그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도 사할린 섬에서 가장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그곳 후손들은 차별과 정체선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모국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장산곶매 :
분단 극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기완 선생이 전하는 황해도 지방의 옛이야기로서, 선생의 저서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통일과 반통일> <장산곶매 이야기>등에 수록되어 있으며,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도입부에도 인용되어 있다
이 책은 ‘처음처럼’에서 시작하여 ‘석과불식(碩果不食)’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획 의도를 필자는 물론 많은 독자들도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필자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아마 역경(逆境)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을 견디는 방법은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며,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처음’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省察)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목이 잎사귀를 떨고 자신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성찰의 자세가 바로 석과불식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과불식의 의미는 씨 과일을 먹지 않고 땅에 묻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이든 한 사회의 어려움이든 역경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처음처럼’의 뜻과 ‘석과불식’의 의미가 다르지 않고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책의 모든 글들도 이러한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여는 글에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이 가로 막으면 돌아갑니다.
분지를 만나면 그 빈 곳을 가득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마음을 비우고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
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27쪽)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과 산골사람이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를 어리석다고 하지만 바다와 산에서 뜨지 않는 해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릿속일 뿐입니다.
바다와 산이라는 현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현장에 튼튼히 발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이
곧 저마다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 관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기는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창백한 관념성을
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안 돼, 도토리야. 너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그래야 우리도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너와 우리가 또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거야. 그게 우리들의 꿈이야."
"관계?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야."
"내가 어떡하면 너의 낙엽들을 도울 수 있니?"
"이제 아무 이야기도 하지마. 나 혼자 갈 테니까, 그냥 여기서 배웅해줘!. 네 목소리를 들으면 돌아가고 싶지 않아지니까, 입은 꼭 다물고."
유이가 그렇게 부탁했다. 그리고 발돋움을 한 유이가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사토시에게 키스를 했다.
"고마워, 사토시. 그럼......"
'유이가 처음으로 나를 사토시라고 불렀다!'
연못을 따라 저쪽으로 걸어가는 유이를 눈으로 뒤쫓으면서 사토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이는 정말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유이의 당부대로 사토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이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사토시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빈민도 거지도 없을 것이며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백만장자 고용주도 굶주리는 피고용인도, 또 취하게 만드는 술도 마약도 없을 것이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존경받을 것이며,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도 정숙과 순결을 굳게 지킬 것이다.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아내 이외의 여성들을 모두 나이에 따라 어머니나 누이나 딸로 대접할 것이다. 불가촉천민은 없고 모든 신앙이 동등하게 존중될 것이다.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기쁘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생계를 위해 일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거나 글로 읽는 사람들 모두가, 만일 내가 침상에 누워 햇볕을 쪼이며 그 생명력을 들이마시며 이런 황홀한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36쪽)
스와데시가 겸손과 사랑의 법칙에 일치하는 유일한 원칙임을 역설한다. 내가 내 가족조차 잘 돕지 못하면서 온 인도를 돕기 위해 나서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다. 나의 노력을 가족에게 집중하고 그들을 통해서 전국민에게, 그리고 또 전인류에게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이 겸손이고 사랑이다. 동기가 행동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95쪽)
우리의 교육에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두뇌는 손을 통해 교육되어야 한다. 내가 시인이라면 나는 다섯 손가락의 가능성에 대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왜 당신들은 정신이 모두이고 손과 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손을 훈련하지 않고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의 삶에는 '음악'이 빠져 있을 것이다. 모든 능력을 훈련하지 않은 것이다. 책에 있는 지식만으로는 아이가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게 할 만큼 흥미를 일으키지 못한다. 두뇌는 말들에 싫증을 느끼고, 아이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리기 시작한다. 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눈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귀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그래서 그 모두는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올바른 서택을 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으므로 그들의 교육은 종종 파멸을 가져온다. 우리에게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고, 옳은 것을 따르고, 그른 것을 피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126쪽)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스와라지는 고립된 독립이 아니라 건강하고 위엄있는 독립이다. 나의 민족주의는 열렬한 것이기는 하지만 배타적인 것이 아니고 어떤 나라나 개인도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법에 관련된 속담은 법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다. 나는 "당신의 재산을 사용하되 이웃의 재산을 해치지 않도록 사용하라"라는 말의 영원한 진실성을 믿는다.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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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
나누는 손이 아름답지만, 가난하여 나눌 것이 적은 손은 순정합니다. 가난보다 더 깊은 기도는 없음을 빈손이 알려줍니다. 일하는 손도 아름답지만 쉴 때 쉬면서 그 손을 조용히 살피는 성찰의 시간도 소중합니다. 일만 하다 죽으라는 인생 아닌 것을 빈손의 묵묵함을 통해 다시 깨닫습니다. 몸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살아가는 손에게 몸이 하는 대답도 있어야 합니다. 존재가 두루 무상해서 하루하루 나이 먹다 보면, 힘없이 앙상해진 손을 가슴에 품어 안고 살아온 날들 되돌아보게 될 테지요. 손이 기억하는 한 평생이-선한 것이건 악한 것이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난을 위해서 쉬지 말고, 맑고 투명한 존재와 마음을 위해 쉬는 손을, 나태해진 손이 아니라 성찰과 기도로 간절해진 손을 꿈꾸어야 합니다. 마음 곳간이 넉넉해지면 손은 가난 속에서 오히려 여유로워집니다. 그것을 일컬어 청빈이라 합니다. 청빈의 서늘한 손끝을 ! (125쪽)
내가 나를 알고 나면 가벼워지겠지요? 조용하고 환하겠지요? 텅비어 거침없는 자리에 무엇이든 오고 가겠지요. 정직한 거울처럼 세상이 비치겠지요. 아름다울 겁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울 겁니다. 다툼없겠지요. 넉넉할 겁니다. 선선한 저녁바람이 쏟아지는 하늘이 그림같았습니다. 좋은데요? (185쪽)
빈손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놓는 연습이 참으로 힘들다.
무엇이든 잡히면 놓으라 했는데.......
집히는 건 모두가 놓아지질 않는다.
헌데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저 앞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그곳인데.....
이것과 저것이라는 분별심과
이것이네, 저것이네, 라는 차별심이
보이지 않아야 하거늘 이제는
도무지 잡히지도 놓아지지도 않는다.
그 어떤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데...........